포레스트 검프 속 역사적 사건 살펴보기

2023. 1. 17. 15:57영화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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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의 현대사 속 중요 장면 속에 포레스트를 끼워 넣는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영화가 촬영될 당시의 기술력으로 역사적 현장의 기록물 속에 포레스트를 끼워 넣는 것이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는 고도의 노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영화를 보아도 합성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그래도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래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실화 영화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의 결정체인 셈이다.
알고 보면 영화가 더 재미있어지는 역사적 장면들 같이 찾아 보자.

1. 포레스트 검프와 엘비스 프레슬리

포레스트의 집에 숙박했던 기타를 든 청년. 포레스트는 그의 노래가 좋아 박자를 맞춰 다리에 보조기구를 장착한 채 흥에 겨워 흔들어 댔는데 그 동작들을 자신의 노래 안무로 만든 인물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길거리에서 본 작은 TV 속 화면의 앨비스 프레슬리는 포레스트가 했던 동작을 따라 하여 로큰롤의 왕이 되었단다. 그 기발한 상상력에 웃음이 난다. 어찌 보면 포레스트가 앨비스 프레슬리의 춤선생이었던 셈이다.


2. 앨라배마 대학 흑인 학생 입학-월리스 주지사와 연방군 대치

조지 월리스 앨러바마 주지사는 인종 분리정책을 추진하던 인물로 인종차별 철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케네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다. 1962년 연방정부가 군대를 동원시켜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인 학생들을 입학시키려 하자, 자신이 직접 학교 강당의 정문을 가로막고 군대와 대치하는 사건을 사건을 일으킨다. 인종 차별이 아직도 심각했던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여주며 프레스트는 입학하는 흑인 여성이 떨어뜨린 책을 주워주는 장면으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다. 현실은 칼라이지만 매스컴 보도 속의 장면은 흑백으로 처리한 장면도 탁월하다.

이후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월리스 주지사는 1972년 대통령 후보로 나갔다가 총격을 당해 평생 하반신을 못 쓰게 되는데 이때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흑인이어서 그는 인종차별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1974년 다시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 당시 월리스는 본인이 앨라배마 주지사 시절에 했던 인종차별주의 정책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했고, 1974년 선거에서는 흑인의 80%가 월러스한테 표를 던져줬다. 반대로 백인한테서는 득표율이 60%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1975년부터 재임한 마지막 주지사 시절에는 케네디/존슨 대통령의 정책을 본떠 인종 차별 정책을 앨라배마에서 철폐하는 데 힘을 쏟았다.

3. 케네디 형제 암살

달리기를 잘하는 포레스트 검프는 앨러배마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전미선수 대표팀이 백악관에 초청을 받아 포레스트도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팀이 대통령의 만찬에 초대받는 것과 같은 경우다.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셔 소변이 급한 포레스트가 대통령과 악수하며 쌀 것 같다고 하는 장면이 코미디다. 볼 일을 마친 포레스트 눈에 백악관 화장실에 있던 마릴린 먼로 사진과 액자 속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사진이 함께 들어오는데 이들을 함께 보여준 것은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의 염문설을 보여주는 소소한 장치라 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유세지인 택사스의 댈러스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갑작스러운 총탄에 목과 머리를 저격당해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살해되는 장면이 TV로 전국에 방송되며 세계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충격을 주었다.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민주당의 차기 유력 대선 후보였는데 캘리포니아 주 경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1968년 6월 5일 LA에 위치한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나서 주방으로 빠져나오다가 피살되었다. 범임인 시르한은 요르단계 이민자로서 평소에 로버트 케네디의 친이스라엘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는데, 원래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나중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형제가 폐지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현재까지 복역중이라고 한다.
형제가 모두 암살된 사건을 어리석은 화자 포레스트는 형제 되기가 힘들다는 엉뚱한 말로 해석을 하여 또 웃음을 준다.

4. 베트남 전쟁

포레스트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여 베트콩의 기습에 부상을 입은 동료 부대원들을 구조하여 무공 훈장을 받는다. 특유의 빠른 달리기 실력으로 친구 버바를 구하기 위해 뛰어가던 포레스트는 중간중간 다친 병사들을 만나 구해주지만 정작 꼭 구하려 했던 친구 버바를 잃게 된다. 또 두 다리를 다친 댄 중위를 구하지만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던 댄 중위에게 원망을 듣기도 한다. 이 전쟁에서 포레스트는 엉덩이만 살짝 다쳤지만 중상을 입거나 사망을 한 군인들도 많았다.

베트남전쟁은 1960년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 일명 베트콩과 미국 사이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말한다. 베트남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발발한 6.25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미군이 해외 파병된 전쟁이었다.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는데 북베트남은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호찌민이, 남베트남은 일본과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던 바오다이가 통치했다.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하려 했는데, 미국은 남북 통일 선거를 하면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이길 것이라 보고 베트남의 분단을 강화했다.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은 ‘베트콩’이라 불리며 게릴라 활동을 했는데, 북베트남의 도움을 받아 날로 강해졌다. 미국은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나섰고 1964년부터 1973까지 10여 년 동안 베트남전을 지속했다. 이 기간 베트남과 인근 국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보다 많은 폭탄이 쏟아졌고 당시 최고의 첨단 무기가 사용됐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120만명, 부상자가 200만명이라고 한다.
이런 엄청난 희생에도 미국은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사실상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베트남은 공산화됐고 인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그 길을 걸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현대사의 큰 오점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두고 가장 그림자가 긴 전쟁이라는 말을 평가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 과정에서 1만 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9년에는 1만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5. 핑퐁 외교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군병원에 후송되었던 포레스트는 우연히 탁구를 배우게 되는데 천부적인 재능으로 재향군인회에서 탁구 시범을 보이게 되고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중국으로 가게 된다. 열심히 탁구만 쳤지만 포레스트는 세계 평화에 기여한 국가적 영웅이 되어 귀국하게 된다.

핑퐁 외교는 1971년 미국 탁구 선수단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오랫동안 적대적으로 대립해 왔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된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지속되면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소련이 흐루시초프 체제로 전환되면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고, 미국은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1년 3월 일본 나고야에서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중국은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1966년 문화 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회 기간 동안 중국 측에서 미국 선수단을 초청하는 일이 있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1971년 4월 10일부터 17일까지 미국 탁구 선수단 15명과 기자 4명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들이었다. 미국 탁구 선수단은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와 면담을 가진 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순방하면서 친선경기를 치렀다. 이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미국 대통령은 20년 넘게 계속되어 온 중국에 대한 무역금지조치를 해제하였고, 중국 탁구팀을 초청해 친선대회를 열면서 양국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같은 해 7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 미대통령 안보보좌관이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과 회담을 가졌고, 이후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는 상하이에서 중국 지도자들과 '상하이 공동성명(Shanghai Communiqué)'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두 나라는 모든 국가의 이익에 합치되도록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아ㆍ태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 규정하였다. 또한 대만과 중국의 문제는 중국인 스스로 외부의 간섭 없이 해결해야 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하였다. 이후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1979년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미국을 방문하였고, 이와 더불어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전격적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를 두고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을 흔들었다(小球轉動大球)'라고 표현하였다. 즉, 탁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적대 관계였던 미국과 중국 간 외교관계가 개선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탁구공을 매개로 한 외교라 부른다.

6. 포레스트 검프와 존 레논

탁구 영웅이 된 포레스트 검프가 토크쇼에 나오게 되고 여기에서 비틀즈의 존 레논과 만나게 된다. 중국이 어땠냐는 질문에 포레스트는 "그들은 가진게 별로 없고 교회도 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존 레논은 이 말을 "소유물도 없고 종교도 없다."고 정리하자 진행자가 상상할 수 없다고 하는데 존 레논이 상상은 노력해 보면 쉬운 일이라고 한다. 반전주의자였던 존 레논은 포레스트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imagine'을 만들게 된다.

존 레논 '이매진' 가사

7.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 다녀온 핑퐁 대표팀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는데 포레스트 검프도 백악관에 가게 된다. 닉슨이 포레스트에게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느냐고 묻자 프레스트는 에벗 호텔에 묵는다고 대답한다. 닉슨은 자기가 아는 더 좋은 곳이라며 호텔을 추천해 주는데 그곳이 바로 워터게이트. 밤에 건너편 건물에서 사람들이 손전등을 켜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전기가 나갔다 생각해 연락한 검프 때문에 범인들이 잡히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드러나게 된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1972년 6월 17일 오전 2시 30분 워싱턴 워터게이트호텔 건물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것이다. 도청장치를 설치하던 괴한 5명이 체포되면서 드러나게 되었으나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워싱턴포스트>지의 신참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디프 스로트(Deep Throat)'라는 익명의 고위 관리의 결정적 제보에 따라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하고, 그 결과 닉슨 당시 대통령이 도청을 지시했음을 밝혀내면서 결국 대통령이 사임을 하게 된 것이다.

8. 애플 컴퓨터

포레스트는 새우사업의 모든 일을 댄 중위에게 맡기는데 똑똑한 댄 중위는 버바 검프 쉬림프 회사가 번 돈을 애플컴퓨터에 투자를 하여 큰돈을 벌게 된다. 포레스트는 애플에 투자한 것을 과일 회사에 투자한 것으로 아는데 바로 스티브 잡스의 그 애플이다. 포레스트는 여기에서 번 돈을 교회와 병원에 기부하고 죽은 친구 버바의 집에도 그 몫을 나누어 준다. 억만장자가 되어 잔디 깎기 봉사를 하는 포레스트의 경제적 자유가 부럽다.
애플이 나스닥에 상장한 해가 1980년이고 포레스트 검프가 개봉한 해는 1994년이다. 저 당시도 애플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업이 되었는데 아이폰은 2001년에 나왔다고 한다. 영화 개봉 이후 이 영화를 보고 애플 주식을 샀어도 대박이라는 사실. 좋은 주식을 골라 투자한 댄 중위의 안목이 부러울 따름이다.

9. 스마일리

제니가 떠나고 난 후 3년 동안 무작정 달리기만 하던 포레스트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가끔씩 그들은 사업에 영감을 줄 수 있냐고 묻는데 개똥을 밟은 포레스트가 그런 것은 예측불허라고 하자 범퍼스티커 장사는 그 말을 활용해 성공을 한다. 또 티셔츠 사업을 실패한 한 사람이 티셔츠를 들고 검프에게 영감을 줄 수 있냐고 묻는다. 검프는 달리기를 하는 중에 도로에 있던 차량이 출발하면서 오물을 맞게 된다. 실패한 사업가는 검프에게 티셔츠로 얼굴을 닦으라며 주는데, 얼굴을 닦고 나서 티셔츠에 묻어있던 흔적이 스마일리. 이를 바탕으로 티셔츠를 만들어 성공을 한다.
스마일리 디자인은 프랑스의 니콜라 루프라니(Nicolas Loufrani)가 개발하여 1997년 미국 저작권 협회에 등록했다. 스마일리를 개발한 니콜라는 스마일리 컴퍼니의 CEO가 되어 스마일리를 활용한 다양한 디자인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노란 바탕에 얼굴을 대충 그려놓은 것 자체가 스마일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혔는지 :(을 그려놓은 건 웃고 있지 않은데도 스마일이라 부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이 스마일리가 나온 뒤 이를 응용해 여러 가지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캐릭터도 나왔는데 이런 비슷한 류의 캐릭터나 이모티콘을 통틀어서 스마일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상으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사실을 알고 보면 영화의 재미가 배가 되는 것 같다. 이 포스팅을 위해 화면을 캡처하며 영화를 다시 보기 하면서 나도 이전에 보지 못하고 넘어갔던 사실을 새롭게 알면서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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