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감상(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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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한용운) 감상 및 정리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2023.08.24 -
월명사 '제망매가' 감상 및 정리
제망매가(祭亡妹歌) 월명사 지음 / 김완진 옮김 생사(生死)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몯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 감상 이 작품은 신라 경덕왕 시대의 승려 월명사가 지은 10구체 향가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누이를 추모한 노래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유를 통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말하는 이는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이에 대한 고통과 무상감을 드러내고, 자신의 괴로움을 불교 신앙을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따라서 말하는 이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작품을 끝맺지 않고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다..
2023.08.21 -
백석 '수라' 감상 및 정리
수라(修羅)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
2023.08.20 -
김춘수 <꽃> 감상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작품 해설 이 시의 화자는 존재의 참된 모습을 인식함으로써 의미 있는 진정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1연 ‘그’는 ‘나’에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무의미한 존재였지만, 2연 ‘나’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참된 모습을 인식하는 과정을 거치자 의미 있는 존재인 "꽃'인 된다. 3연 나의 빛깔과 향기..
2023.07.29 -
백석, '고향' 감상 및 정리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의 작품은 읽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냥 일상적인 담담한 말인데 묘한 위로와 감동을 준다. '고향'도 그렇다. 낯선 타향에서 홀..
2023.02.26 -
기형도 '엄마 걱정' 감상 및 정리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어른이 된 화자가 어린 시절의 외롭고 고달팠던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의 시이다. 어린 화자는 빈방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고 그 시절을 떠올리는 어른 화자는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느끼고 있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 밥처럼 방에 담겨' 라는 표현을 읽으며 혼자 있는 어린 화자의 외로움과 기다림이 느껴져 가슴이 미어져 온다..
2023.02.25